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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조각 모음

명절의 향수

내 어릴 적 명절은 대단한 행사였다. 명절 전날 목욕탕에서 때를 벗겨내는 것부터 시작한다. 다음날 아버지 차로 시골길을 지나, 산골짜기 마을 고모할머니댁에 도착한다. 마당에 들어서면 아궁이에 매캐한 장작 타는 냄새가 마중 나온다. 작은 집에 친척들이 스무 명 가량 모인다. 어머니를 포함한 친척 아주머니들은 음식을 준비하고, 친척 아저씨들은 대낮부터 술잔을 기울이거나 잡담을 나눈다. 아이들은 아이들 대로 모인다. 추석엔 산에 밤송이를 주으러 가기도 하고, 설엔 언 논에서 썰매를 타기도 한다. 여느 집처럼 명절에는 탕국에 각종 전, 나물을 먹는다. 명절에 따라 송편이나 떡국이 추가되기도 한다.

30대 중반. 아이가 두 명이 생겼다. 네 가족이 동남아에서 산다. 명절에 한국을 갈 수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첫째가 태어난 뒤 육아휴직 중에 한국에서 맞은 설이 한국에서 보낸 최근 명절이다. 해외에서 맞는 명절은 공허하다. 차례상도 없고 떠들썩한 친척들도 없다. 집에서 조촐하게 해 먹는 떡국이나, 송편을 제외하면 명절을 느끼기 어렵다. 건조하고 서늘한 명절의 장작 타는 냄새는 동남아의 뜨겁고 습한 날씨로 치환된다. 썩 달갑지 않은 변화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아내는 명절 증후군을 느낀 지 오래다. 차례상을 차릴 필요도 없다. 또 시집을 가지 않으니, 시집살이도 없다. 고부가 만나질 않으니 고부갈등은 있을 수 없고, 형제가 얼굴을 맞대지 않으니 얼굴 붉힐 일도 없다.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만 남았다. 특히 한국에 계신 부모님들이 손주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크다. 미움, 시샘처럼 찌꺼기 같은 감정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몇 해전 차례상 차리기가 온라인으로 서비스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온라인 가상의 공간에 상을 차리고 지방을 쓴 단다. 온라인 차례상에 올릴 사진을 업로드 하고 가상의 공간에 향을 태우는 서비스. 새로운 명절 모습이다. 내 딸들도 새 명절 문화를 겪으며 자랄 것이다. 차례상을 온라인에 차리고, 친척들끼리 가상공간에서 만나는 미래형 명절. 장작 타는 냄새로 대변되는 내 명절의 경험은 아이들에게 ‘세뱃돈 입금’이라는 알림음으로 대체될 것이라 생각하니, 세월이 무상하다. 언젠가 생길 손주, 손녀들을 명절에 안아볼 수나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