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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갈 곳과 먹을 것

추사관. 제주도에서 추사체를 만나다.

 대정읍 추사로에 위치하고 있는 추사관. 몇해전 알쓸신잡에서 소개된 후로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추사관은 2007 추사유배지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며 재건립되면서 새단장을 하였는데, 그것이 지금의 건물이다. 추사관 안에 전시되어 있는 세한도 그림의 집을 본따 지은 건물이다.

 

 추사관으로 가는 길에는 감자창고처럼 생긴 추사관 뿐만 아니라 높지 않은 돌담길 비스무례한 것이 보이는데 이는 대정읍성이다. 태종 18 현감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성벽이 토속적인 모습이다.

 

 

 제주도에 방문하여 추사관에 경험이 없다면, 방문을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김정희의 작품, 건축의 아름다움 혹은 대정읍성의 모습을 제쳐두고서라도 입장료가 무료이다. 한국 역사에서 최고의 글씨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김정희, 한석봉인데 사람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국가지정문화재의 입장료가 무료이다! 

 

 

 추사관은 내부의 전시된 컨텐츠 뿐만 아니라, 전시관 건물 자체로도 볼거리이다. 밖에서 보면 곡물창고, 감자창고처럼 생긴 그렇게 보이지 않은 전시관이다. 대부분의 공간이 지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추사관은 건축가 승효산씨가 실계한 것으로 세한도의 모습을 건물이다. 제주에서의 추사의 삶이 은거와 유배이었기 때문이, 그는 고의적으로 대부분의 공간을 지하에 위치시켰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상에 추사관을 노출시킬 경우에는 주위의 민가와 대성읍성을 압도하는 크기의 건축물이 밖에 없어 유배당한 추사를 기리기 위한 목적에 반하기 때문이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재밌는데, 램프가 대각선으로 계단들을 가로지르는 형태이다.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 정말이지 많다. 그리고 그의 글씨는 시대별로 모습이 계속 변한다. 그의 인생 굴곡에 따라, 중국의 글씨를 배우며 힘이 강해 지기도 하고 말년으로 갈수록 기름기와 힘이 빠지기도 한다. 추사체란 것이 어떤 정형화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글씨를 모르는 까막눈이 보아도 장년기의 글씨와 유배지에서의 말년의 글씨의 차이점을 느낄 있도록 전시물들이 배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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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체 설명글

<추사체> 김정희의 초인 추사에서 나온 글씨체이다. 일반적으로 추사가 비석에 새겨진 서한 시대 예서의 필법을 연구하면서 <추사체>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실체는 매우 다양하여 정의하기 힘든데, 개화사상가로 유명한 박규수의 <추사체 성립론> 널리 알려져 있다. “추사가 어려서는 중국 명나라의 서예가인 동기창에 뜻을 두었고, 연경을 다녀온 후에는 옹방강을 열심히 본받았다. 이때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제주도 귀양살이를 다녀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모습이 사라지도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추사체> 제주도 유배시절에 완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임창순에 따르면, 추사가 제주도 유배를 거치며 울분과 불평을 토로하면서 험준하고도 해학적인면은 갖춘 서체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동양 서예사에서 <추사체> 청나라 서예가들도 이루지 못한  것을 본받으면서  것을 창출한다.”  입고출신의 이념을  나타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글씨 중에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은광연세 판전이다. 제주 대기근때 자신의 평생 재산을 내놓으며 도민을 구휼하여, 정조 칭송을 받아 의녀반수가 김만덕이라는 여성이 있다. 김정희는 유배지에서 그녀의 선행을 기리며 가문의 3대손에게 써준 글이 은광연세이다. 그리고 ‘판전 그의 인생 마지막 글씨라고 한다. 앞의 글씨들 보다 획이 얇고, 열에서 조금 벗어난 비뚤비뚤해 보이기 까지 한다.

 

 

 글씨도 글씨지만, 추사관의 슈퍼스타는 단연 세한도이다. 글의 앞에서 소개 했듯이 그림 속의 집을 본따 추사관을 지었다. 세한도를 모르는 채로 전시물을 보게 된다면, 세한도가 추사관을 그린 그림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한도가 곳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흥미롭다. 그림의 소유자인 추사의 제자 이상적이 죽은 , 그의 제자 김병선에게 그리고는 휘문고 설립자인 민영휘에게 소유권이 차례로 넘어갔다. 민영휘의 아들인 민규식이 일본인 후지쓰카 치카시에게 세한도를 팔았다. 후지쓰카는 청의 경학을 전공하는 학자로 추사에 심취하여 추사가 남긴 작품들을 싹쓸이하여 전쟁말기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사실을 알게 소전 손재형이 일본으로 후지쓰카를 만나 오랜 설득 끝에 세한도를 건내 받아 왔다. 운명인지를 모르겠지만, 세한도가 한국으로 건너간 후지쓰카의 서재는 폭격을 맞았다고 한다. 소전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수중의 인완제색도 금강전도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팔았고, 세한도는 저당을 잡고 돈을 끌어 썼다. 이리하여 세한도는 손세기에게 넘어갔고 손세기의 아들 손창근씨가 소장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하였다. 추사관에 있는 작품은 손창근씨의 허가 아래 만들어진 복재품이다.

 

 추사의 흉상은 임옥상씨의 작품으로 명예관장인 유홍준의 지인이라고 한다. 작품을 추사관의 설계자 승효상씨는 기껏 비운 공간을 흉상이 채워놓았다고 투덜거리기는 했으나, 작품자체는 아주 훌륭하여 추사관의 방문한 사람들의 자신의 이름보다 임옥상의 이름만 기억할 것이라는 볼멘소리를 냈다고 한다.

 

 

 추사관을 나오면 뒤로 추사유배지가 이어진다. 추사는 헌종 6 55세가 되던 해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간 곳에서 머물렀다. 유배 초에는 포교 송계순의 집에서 머물다가 , 강도순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유배지에 머물며 제주 유생들에게 가르침을 내리고 제주 지역 학문 발전에 힘썼다고 한다. 추사관 안에서 보았던 국보 180호인 세한도도 곳에서 그려졌다고 한다. 현재의 유배지는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복원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