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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후감

황금방울새, 가까우면서 가질 수 없는 꿈

1675 페이지의 대작이다. 사건으로 말하자면 대단할 것도 없다. 미술관 폭발사고가 일어 났고, 그 때 엄마를 잃은 소년이 사고 당시 그림 하나를 가지고 오게 된다. 믿던 친구 놈이 그림을 훔쳐 암시장에서 거래하다가 잃어버린다. 그림을 다시 찾으러 네덜란드로 가서 사람까지 죽였지만, 그림을 찾질 못 한다. 친구 놈이 신고하여 포상금을 두둑하게 챙기고 주인공과 나눠 가진다. 신고로 인해 그림은 다시 미술관으로 돌아간다.

이런 간단한 이야기를 1600여 페이지의 소설로 만든 것에는 일단 자세한 묘사가 한 몫 한다. 책에서 시온이 앤디네 아빠 바버씨를 처음 만나는 장면의 묘사를 보자.

.....바버 씨는 아주 약간 이상해 보였고 어딘가 창백하고 은빛이 나는 느낌이었는데, 꼭 코네티컷의 ‘정신병자 양성소’(아저씨는 그렇게 불렀다)에서 받은 치료 때문에 백열광을 발하게 된 것 같았다. 눈은 이상하고 불안정한 회색이었고 머리카락이 새하얘서 무척 나이 들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얼굴이 젊고 분홍색이어서 심지어는 소년 같기도 했다. 혈색 좋은 뺨과 길고 고풍스러운 코가 일찌감치 센 머리카락과 조화를 이루어서 좀 덜 유명한 건국의 아버지, 대륙 회의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표자였는데 21세기로 시간 이동한 사람처럼 친근한 인상을 주었다. 어제 침실 바닥에 벗어 두었던 옷을 조금 전에 주워 입은 것처럼 쭈글쭈글한 정장 셔츠와 비싸 보이는 양복바지 차림이었다....

어마어마한 묘사이다. 각기 상황, 인물, 심리 묘사를 항시 이런 식으로 전개하여, 책을 읽는 동안 다소 늘어지는 감도 있었다.

또 책 페이지수에 한 몫하는 것은 에피소드들이다. 그림과 관련한 큰 흐름과는 무관하게 다양한 작은 사건들이 이야기 중간 중간 양념처럼 곁들여져 있다. 라스베가스에서 보리스와 지내는 생활, 개 한 마리와 라스베이가스를 떠나며 버스를 타는 여정, 호비 아저씨로 돌아간 이 후 조기대학 생활,, 등등 사소한 에피소드들이 가득하다. 시온이 겪은 생활을 생략이나 분절없이 빼곡하게 보여준다.

시온만큼 중요한 인물은 보리스이다. 그림을 미술관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시온이지만, 이 후에 그림으로 암거래를 하고, 그림을 다시 미술관으로 보낸 것은 보리스의 활약 덕이다. 사실상 극 후반부에는 주인공보다 더 중요하게 흐름을 이끌어 나가는 인물이다. 러시아인으로 설정된 보리스는 대화할 때 횡설수설하는 부분이 많다. 핵심을 짚어가는 대화가 아니라 횡설수설하다가 마지막에 상대가 원하는 답을 내놓는 화법이다. 영어가 서툰 러시아인의 쓰는 영어 문장을 한글로 읽었기에 그렇게 느낀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온은 황금방울새 그림에 집착한다. 그림의 인간 버전이 피파이다. 시온과 같은 사고를 겪은 아이이다. 그림과 마찬가지로 시온이 온전히 가질 수 없기에 더욱 간절히 바라는 이상형이다. 그에 반해 앤디의 동생인 캐시는 현실 세계의 여자이다. 좋은 만남으로 결혼까지 약속하지만, 그녀는 사실 내연남이 있었다. 이상향에 닿지 못해 현실에 머물지만, 그 현실마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질 않는다. 내 인생에도 황금방울새나 피파가 있었던가? 있었다면 무엇이며, 누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