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산리 고분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백제역사유적지구 중 한 곳으로 무령왕릉으로 특히나 유명한 곳이다. 충청권 인근의 학생이라면 소풍이나 견학 등으로 한번은 와보는 곳.
세계유산 등재 기준
1. 특정 기간, 지역 내 중요한 인류 가치 교류의 증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고고학적 유적과 건축물은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에 존재하였던 고대 동아시아 왕국들 간에 진행된 건축기굴의 발전과 불교의 확산은 가져온 교류를 보여준다.
2. 문화적 전통 또는 문명에 관한 독보적이거나 특출한 증거;
수도 입지 선정을 통해서 백제의 역사를, 불교 사찰을 통해 백제의 내세관과 종교를, 성곽과 건축물의 하부구조를 통해 독특했던 백제의 건축 기술을, 고분과 석탑을 통해 백제 예술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유산들은 사라져 간 백제 문화와 역사를 보여주는 특출한 증거이다.
주차장에 주차를 한 뒤, 고분군을 향하다 보면 중간에 돔처럼 생긴 건물이 있다. 송산리고분군 밖에 위치하고 있기에 입장료를 낼 필요없이 들어갈 수 있다.
들어감과 동시에, 이 곳은 어린이들을 위한 곳임을 당장에 알 수 있게 된다.
두명의 박씨는 TWO PARK?은 여기서도 열일을 하였더랬다.
곰나루, 웅진 지명에 관한 이야기가 알기 쉽게 만화로 되어 있다.
공주 박물관에 있는, 무령왕의 동상과는 크게 다른 동상이 이 곳에도 있다. 박물관에 있는 것이 공식 어진인데, 이렇게 달라도 되나 싶다. 무령왕에 관한 이야기 중 눈에 끄는 것이 왕의 출생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다음과 같다.
무령왕은 키가 8척이나 되고, 얼굴이 아름다웠으며, 성품이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따랐다고 한다. 이 무령왕은 일본의 작은 섬에서 태어난 것으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 461년, 개로왕의 명을 받은 곤지가 일본으로 가는 도중 큐슈의 '가카라시마'라는 섬에서 무령왕을 낳았고,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은 '섬'이란 뜻의 '사마'라 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기록에 대하여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지만, 출생 연대와 '사마'라는 이름이 무령왕릉 출토 지석의 기록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어서 이 자료의 신빙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현재 일본 사가현 가라츠시에 가카라시마라고 하는 작은 섬이 있는데, 공주와 가라츠 시민들이 모금하여 2006년 무령왕 탄생 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무령왕 축제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민간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외에도 공산상에 관한 이야기도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곳의 크라이막스는 백제 복식 체험. 아이들보다 같이 간 부모들이 더 좋아하는 코너이다.
그럼 나와서 다시 송산리 고군분을 향하자. 입장료는 거저에 가깝다.
입장을 하면, 우선은 모형전시관을 지나쳐서 고분군으로 향하기를 추천한다. 왜냐하면 고분들의 입구는 다 막혀서 입장이 제한되기 때문에, 고분주위의 산책로를 걷는 것이 고분군에서 할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 그러므로 체력을 방전시켜 놓고, 모형박물관 실내로 들어가서 여유있게 전시품을 관람하는게 좋다.
다시 모형전시관으로 향하자.
5호분과 6호분, 그리고 무령왕릉이 재현되어 있다. 고증에 충실하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5호분은 1931년에 우연히 발견된 고분으로 1~4호분과 마찬가지로 굴식 돌방무덤이다.
6호분의 특징은 사신도. 무령왕릉과 마찬가지로 굴식 벽동무덤이다. 1938년 일본인 가루베지온에 의해 무단도굴되었다고 한다. 씨발놈 처녀분이었을 가능성이 큰 고분인데, 이 안에서 어떤 문화재가 있었을지 알 길이 없다. 벽돌과 사신도를 보아 중국 남조의 영향을 크게 받은 고분이다.
마지막으로 메인 디시. 무령왕릉이다. 이 곳에서 발견된 문화재 중 후에 국보로 지정된 것만 15개. 유물 대부분 국립공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70년대 6호분의 배수로 공사를 하던 도중, 우연히 발견된 릉이다. 본래 네이밍 순서라면 송산리 7호분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내부에서 무덤의 주인을 나타내는 석판이 이 석판 또한 국보 발견되었기에, 무령왕릉이라 불리고 있다.
국보급 문화재가 15개가 발굴된 만큼 도굴이 한번도 되지 않은 고분의 발굴이고 최고의 발굴이지만, 동시에 최악의 발굴 중 하나로 꼽힌다. 그 이유는 몇 년은 걸릴만한 발굴을 하룻밤에 끝낸 것. 그래서 최초 유물의 배치의 실측자료나 사진 자료가 현저히 조악하고 부족하다. 일제시대 때는 일본인에 의해 모든 발굴작업이 진행되어 당시의 발굴단은 발굴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전무했었고, 당시 기자들과 기레기 마을주민들이 주위로 모여 북새통을 이루는 바람에 번개불에 콩 구워먹듯이, 자루에 문화재를 쓸어 담 듯하여 발굴을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실재로 기자와 구경꾼들에 의해 몇몇 문화재는 파손되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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